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학 농민 혁명 (문단 편집) === [[마지막 생존자]] === 동학농민운동 관련자 중 '''1985년에 110세'''의 나이로 사망한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85111200329205027&editNo=2&printCount=1&publishDate=1985-11-12&officeId=00032&pageNo=5&printNo=12348&publishType=00020|엄이경]]이라는 사람이 있다. 그는 운동의 발단인 만석보 축조 당시에 돌을 나른 것을 시작으로 20살 때인 1895년에 동학에 가담하여 동학혁명 시기 각종 전투에 참가했으며, 전봉준 장군의 경호원 겸 연락 담당을 맡았다고 한다. 개항과 동년에 출생하여 동학농민운동부터 [[서울의 봄]]까지 모두 지켜봤던 셈. 비록 [[6.10 민주 항쟁|6월 민주 항쟁]]과 민주화 이후는 보지 못했으나 이 정도만 해도 한국 근현대사의 증인이나 다름없다.[* 원문 기사 말미의 정주(井州)시는 기사의 정읍'''군'''과 함께 오늘날의 [[정읍시]]를 이루는 과거 행정 구역 이름이었다. 1995년에 일제시기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손보면서 [[도농통합]]이 이루어지며 정읍시가 되었다.] 사람은 아니지만 비교적 최근까지 남아있던 산 증인은 [[전라북도]] [[정읍시]] 이평면에 위치하고 있던 이른바 "말목장터"의 [[감나무]]였다. 예전부터 역참과 장터가 위치해 그 특성상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었다. 고부군수 [[조병갑]]의 탐학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[[전봉준]]은 이곳을 찾아 감나무 위에 올라가 장터의 군중들에게 조병갑의 행패를 낱낱이 알리고 관아로 쳐들어갈 것을 촉구했고, 이에 호응한 농민들이 고부 관아(현재의 [[고부초등학교]] 및 고부면사무소 자리)를 습격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의 불씨가 타 올랐다. 2001년 전라북도 기념물 지정 당시 수령 180년 가량이었던 이 감나무는 항쟁의 진압과 [[일제강점기]], [[광복]]과 [[한국전쟁]], [[새마을운동|산업화]]와 [[민주화]], [[노무현]]의 [[참여정부]]까지를 모두 지켜보고 주변[*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감나무 옆에는 예비군 면대 사무실이 위치해 있었다.]이 초가집에서 슬레이트, 상가 주택으로 바뀌는 2000년대까지 남아 있다가 '''2003년 [[태풍 매미]]'''로 쓰러져 고사했다.[* 전 [[문화재청]]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[[유홍준]]은 [[나의 문화유산 답사기]]에서 [[제13대 대통령 선거]] 당시 저 감나무에 [[김대중]]의 현수막이 걸려있던 것을 "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모습을 대변"하는 명장면으로 호평하기도 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